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조선 영조) (문단 편집) === [[수렴청정]]과 재수렴 시도 === [[정조(조선)|정조]]가 [[1800년]](정조 24년) [[음력|음]][[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고 이어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국정을 주도하면서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다. '''[[신유박해]]를 주도하고, [[장용영]]을 폐지하며 [[규장각]]을 [[축소]]시켰고, 공노비[* 왕실이나 관아(官衙)·주군(州郡)에 소속되어 사역한 최하층의 신분.]를 혁파(革罷)[* 시대이나 풍습에 맞지 않는 기구, 제도, 법령 따위를 없애다.]하였다.''' 평가는 후술. 3년 동안 [[수렴청정]]한 후 [[순조]]의 친정이 시작됨을 선포하고 물러났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을 거두고 환정하다.''' >----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거두고 환정(還政)[* 섭정하던 사람(정순왕후)이 정권을 본래 임금(순조)께 맡김. 친정을 의미]하였다. >(중략)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차대를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경신년의 창황(蒼黃)하고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내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이 없는 데다가 또 여러 해 동안 고질(痼疾)을 앓아 왔으므로, 보통 사람처럼 일을 책임질 수 없었던 것이 오래되었다. 불행하게도 망극한 때를 당하여 부득이 [[조선/왕사|종국]](宗國)을 위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담당하여 끌어온 지 3년이 되어 [[결혼|가례]](嘉禮)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니, 이 마음의 기쁨이 또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나의 처음 뜻은 새해에 곧 수렴 청정을 거두려 했었는데, 그 사이에 큰 재이(災異, 정조의 승하)를 당하였으니, 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마땅히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비상(非常)한 일인데, 이런 비상한 재이가 있게 된 것이다. 해는 [[순조|주상]]의 보령(寶齡, 나이)이 오히려 1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새해 초두에 곧 '''[[수렴청정|수렴 청정]]'''을 거두려 하였다. 새해에는 다시 수렴 청정하지 않으려 한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통유(洞諭, 밝게 타이름)하고 차대를 앞당겨 정한 것이다." >(중략) >하였다. 대왕 대비가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__이것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순조|주상]]의 나이가 곧 15세에 차게 되어 이제 친히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단지 기뻐하여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__"''' >하였다. >---- >- '''《[[순조실록]]》 5권, 순조 3년([[1803년]], 청 가경(嘉慶) 8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물론 물러나기가 무섭게 훗날 [[순원왕후]]가 되는 [[순조]][[왕비|비]]의 간택을 반대한 권유(權裕, 1745 ~ 1804)를 탄핵하며 [[벽파]]에 대한 [[시파]]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정순왕후는 당황하여 수렴청정을 그만둔 지 6개월 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정사에 개입하려 했다'''.[* 이하의 인용문은 인용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현대적 감각에 맞게 요약한 것이며 실록의 원문과 그 해석은 상당히 길고 어려우니 감안하여 읽도록 하자.] [[순조]]를 시켜서 >"할 말이 있으니 대신들 좀 모으라." 고 명을 내렸는데, 대신들이 입궐하자 정작 정순왕후는 [[순조]] 뒤에 수렴을 치고 앉아 있었고 [[순조]]가 >"자전께서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신다." 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다시 수렴을 재개하겠다는 암묵의 표시였다. 그러자 [[소론]]인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1745 ~ 1821)가 갑자기 정순왕후의 지난 4년간의 업적을 칭송하더니 >"그건 그렇고 지금 하는 일이(수렴 재개) 이치에 맞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순조|성상]](聖上)께서 하실 것이니 수렴하지 마시죠." 라고 대놓고 수렴을 거둘 것을 적극 청했다. 그러자 벽파의 수장인 [[우의정]] [[김관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의 사촌 동생 김한록의 아들로, 정순왕후와는 6촌간이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같은 "주"자 항렬이다.]도 동의했다. 워낙 명분과 상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지라 정파가 다르고 아니고를 떠나 사실상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였다. 이에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중한 것은 다 알지, 근데 요즘 권유(벽파)를 탄핵하면서 나오는 말을 보니까 누군가가 [[김조순]]([[시파]])의 [[순원왕후|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 '누구'가 대체 누구냐?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지 않으니 상황이 더 시끄러워지잖아. 그래서 대간에게 그 '누구'가 누군지를 분명히 하게 하고 나온 김에 내 심중에 있는 말도 다 하려고 한다." 고 설명했다.[* 당시 권유가 [[1801년|순조 1년]](1801), 즉 3년 전에 올린 상소를 가지고 문제삼았는데 권유의 상소문 말미에 '재앙을 피하기 위해 굴뚝을 굽게 만들고 나무를 옮긴다.'는 뜻인 '''곡돌사신'''(曲突徙薪)이란 말이 쓰였다. 즉 이 말을 쓴 의도를 가지고 얘기한 것이었다. 권유 본인도 [[결혼|대혼]]을 저지하기 위해 쓴 말이라고 털어놓았으며 정재민, 이안묵(李安默, 1756 ~ 1804) 등 벽파 강경파들과도 얘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이 일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벽파 거물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당시에도 약간 문제가 있는 발언이었는지 당시에도 벽파의 수장 [[심환지]]가 "무릇 '교목세가'란 충신과 명신의 자손인데 권유가 말을 좀 잘못한 거 같은데요?"라면서 가볍게 조사할 것을 청했다.] 그러자 이시수는 지지 않고 반박하길 >"그렇다면 [[순조|성상]]께 말씀드려 조용히 하면 되지 왜 수렴 치고 나와서 자전 마마의 공덕에 손상 끼치십니까?" 라고 아뢰었다.[* 사실 좋게 넘어가자면 이 하교를 받고 대충 넘어가도 될 일이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이에 정순왕후가 슬슬 열받아서 >"사람들이 뭔 일만 있으면 다 내 탓이라고 씹어대는데 난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 참겠다. 나보고 오늘 스스로의 공덕을 해쳤다고? 분통한 일이 있는데 해명도 못 한단 말이냐?" 라고 외쳤다. 이에 이시수가 대답하길 >"그럼 [[순조|성상]]께 말씀드려 처분하면 되지 왜 수렴을 치고 엄한 하교를 내리시나요?" 라고 했고, 이에 [[김관주]]가 이시수의 말이 맞다고 거들었다.[* 김관주는 대비의 6촌 오라비다. [[벽파]] 수장에 대비의 오라비인 [[김관주]]조차도 [[소론]]의 수장인 이시수의 편을 들어야 할 정도로 대비의 행위는 명분이 없었다.]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거두면서 큰 형정에는 참여한댔지?" 라고 과거의 일을 상기하자 이시수는 >"물론이죠. 작은 일에도 얼마든지 참여하시지요. 그런데 수렴은 거두고 전하를 통해서 참여하세요. 그럼 자전 마마의 공덕이 빛날 것입니다." 라고 했고 정순왕후는 정말로 열받아서 >"내가 공덕이 어디 있소? 지금 공덕이란 거짓말로 날 속이는구나!" 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이시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요? 신하 된 몸으로 그런 죄를 짓다니 마땅히 죗값을 받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실제로 왕이라 할지라도 신하 앞에서 "너 거짓말 했어"라고 하는 건 크나큰 실례였다.] 그러자 정순왕후는 >"내가 무식해서 오늘 좀 추태를 부렸다. 그런데 나도 말 좀 하고 살자. 왜 그것도 못 하게 만드냐?" 라고 좀 누그러진 투로 말하자 이시수는 통곡하면서 >"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신은 즉시 죽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라고 했고 [[김관주]]가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라고 정순왕후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백기를 들고 >"내가 견식이 없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죄 삼지는 말아 주시오. 앞으로 일이 있으면 언교를 내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수렴을 거두고 물러났다. '''이전까지는 명분을 쥐고 행동했기에 각종 정치적 사안에서 [[벽파]]적 입장을 내세우는 데에 거칠 것이 없었던 정순왕후가 명분 없는 재수렴 시도를 자행함으로써 반대파의 반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권유의 위기'를 본 대비가 권유를 옹호하기 위해 재수렴하려 했다가 '수렴이 웬말입니까?'라는 명분을 쥔 이시수에게 저지당한 것이다. 벽파이자 정순왕후의 친척인 [[김관주]]도 이시수를 거들 정도로 명분은 이시수 쪽이 강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소론)와 우의정 김관주(金觀柱, 벽파) 및 연명 상소하였으나 채 비답을 받지 못했던 전 양사(兩司)의 여러 대신(臺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경 등에게 하교하실 것이 있어 지금 바야흐로 수렴(垂簾)하고 계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수렴이야말로 얼마나 막중·막대한 일입니까? 경신년(1800년)에 천붕(天崩, 정조의 죽음)한 초기에 신 등이 울며 우러러 청하였더니, 자성(慈聖)께서도 울며 억지로 따르셨습니다. 그리하여 4년 동안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시고 성궁(聖躬, 순조)을 보호하셨으니, 자성의 덕과 공은 천고에 탁월하십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신 등을 특별히 부르셨을 적에는 환히 유시하시고 철렴(撤簾=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폐지하는 것.)하셨으니, 그 광명 정대함은 100세(百世)가 지난 뒤라도 할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습니다. 신은 하교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오나, 주상께 하교하셨다면 주상께서 스스로 신 등에게 널리 유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을 간책(簡策)에 쓰고 팔방에 반포한다면 자성의 덕에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즉시 도달(導達=모르는 사정을 때때로 넌지시 알려 주는 것.)하시어 빨리 수렴의 명을 정침(停寢=하던 일을 중도에서 정지하는 것)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도 대략 같았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수렴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랴? 그리고 또한 어찌 철렴한 뒤에 다시 이런 일을 하랴? 옛날 우리 [[명성왕후|명성대비]](숙종의 모후)께서 사친(私親)의 일 때문에 또한 이런 일이 있었으니, 그때는 뭇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사류(士類)를 몰아내고 있었는지라 대비께서 또한 부득이 수렴하셨던 것이다. 국조(國朝)에 이미 이런 전례가 있으니,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행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내 지식이 없는 일개 부인으로서 겸하여 병까지 많으니, 조정의 일을 어찌 참여해 알 수 있겠는가? 지난번 국가의 위의(危疑)를 당하여서는 국조(國朝)의 옛 전례를 준행하여 힘써 따르도록 노력해 왔다. 주상의 보령(寶齡)이 이제 15세가 되었고 예덕(睿德)이 일찍 성취되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 내 어찌 철렴하지 않으랴? 차후로의 일은 전적으로 뭇 신하들이 잘 보도(輔導)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나랏 일에 대해 대충대충 보고만 있으랴? 조정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나는 진실로 계획을 세워 한 바도 없지만 또한 지나친 잘못도 없는데, 매번 사단이 있을 때마다 곧 나를 들어 말하고 있으니, 지금 조정의 모양은 선왕의 의리와 모두 흐릿해지고 있다. 근자에 듣건대, 양사의 연명 상소에 10월에는 길함이 없어 삼간택(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는 구어(句語)가 있었으나 성명을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하고, 이른바 일관(日官)을 끼고 장차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상소에서 아무리 노출시키지 않았다 할지라도 외간에서 지목하며 말을 자자하게 전하고 있으며, 나 또한 얻어들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니 이미 지적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하여 솔직하게 진달하지 않고 모호하게 덜어 숨겨 그 의혹을 불어나게 하는가? 옛날 명성 대비 때 주상께서 춘추가 한창이셨으나 그래도 품지(稟旨)한 뒤에 행하셨다. 지금 우리 주상도 또한 반드시 일에 따라 나에게 품정(稟定=위에 아뢰어 결정을 받는 것.)하고 있으니, 지금 나의 일이 어찌 조정의 정무(政務)에 간예하고 권세를 전행(專行)하고자 하는 계책이겠는가? 또한 어찌 아무 일 없이 수렴하는 것을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겠는가?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게 말하지 아니하여 한갓 말만 시끄런 상황을 불러 일으키기에 한번 불러 묻고 심중에 있는 분을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대간의 상소에 말한 바는 신이 원본(原本)을 보지 못했기에 쓴 말이 어떠한 것인지 지적한 바가 누구인지를 감히 상세히 알지 못하나, 옛날 [[명성왕후|명성대비]] 때에는 흉도(凶徒)들이 근종(近宗)을 끼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도모하여 그 기미가 심히 급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예사롭지 아니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자전께서 하교하시고자 하는 일을 만약 전하께서 세 번 문안 인사를 드릴 즈음에 조용히 상세하게 알려주셨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마땅히 자교(慈敎)를 선포하여 마땅히 죄주어야 할 사람을 엄하게 처분하셨을 것입니다. 이미 철렴한 뒤 매번 한 가지 일이 있을 적마다 또 다시 수렴한다면, 어찌 자전의 덕에 크게 관계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자성의 망극한 은혜를 입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폐부에 새겨 두고 있으니, 눈으로 자성의 덕에 장애가 있음을 보고도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자성의 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앙품(仰稟=우러러 여쭘)하여 속히 도로 정침토록 하소서. >하고, 김관주의 아룀 또한 같았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저 대간이 이미 말한 바가 있다면 명백하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들어 말하니, 크게 놀라고 분하게 여길 바로다. 경신년 이후로 내가 나랏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비록 여항(閭巷) 사이의 일로 말할지라도 집안일에는 반드시 가장이 있어 주장하는 법인데, 지금 주장한 사람은 나이니, 내가 홀로 담당한 일로 이런 해괴한 말을 들으니, 그 분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무슨 말씀인들 품하지 않겠으며, 자성께서 또한 무슨 말씀인들 다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자성의 하교를 신 등에게 선포하신다면 그 말의 허실이야 어찌 조사해 낼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대간의 상소는 또 조항진(趙恒鎭)의 일을 논하며 조항진을 처분한 전교(傳敎)까지 제기해 언급했는데, 조항진은 존호(尊號)의 일로 선류(善類)를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이 처분이 있었던 것이며, 주상 또한 이미 처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이것을 말하니, 어찌 말이 되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답을 받은 상소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대의(大意)만을 들었고 전편(全篇)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의 말이 과연 잘못이라면 이것은 바로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되 만약 죄줄 만한 것이 있으면 위에서 처분하시기를 천만번 옹축(顒祝)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옛날 [[선인성렬황후 고씨|선인태후]](중국 북송 말기의 황태후)는 만세(萬歲) 뒤에 군소배(群小輩)가 비로소 허구 날조하고 속이며 핍박하는 계책을 내었다. 지금 나는 한 가닥 숨이 아직도 붙어 있으나 남은 해가 많지 않은데, 쇠모(衰暮)한 노경에 이런 해괴한 말을 들었는지라, 한번 나의 분한 심정을 죄다 유시하고, 또한 주상이 처분하는 일을 참여해 듣고자 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찌 나 자신으로부터 처분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선왕의 큰 의리가 장차 이런 무리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 것이고, 침척(侵斥)과 무핍(誣逼)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군신(君臣) 상하가 마음을 함께 하여 협찬(協贊)하는 도리이겠는가? 주상이 어찌 저쪽이나 이쪽에 대해 애증(愛憎)이 있으랴마는, 인심과 세도가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다. 경 등은 나의 오늘의 거조(擧措)를 실덕(失德)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비록 분통스런 일이 있다 해도 또한 한마디 말도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인가? 선조(先朝) 때는 나 또한 일찍이 언교(諺敎)가 있었다. 참으로 경 등의 말과 같다면, 언교 또한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그때의 언교는 신 또한 일찍이 삼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처분하실 일이 있다면 비록 언교가 없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어찌 처분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삼가 오늘의 거조를 보건대, 자충(慈衷)이 절실히 분해 하시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렴은 어리석은 신이 사죄(死罪)를 범한다 할지라도 적이 성려(聖慮)가 주밀(周密)하게 생각하시는 데 미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근 30년 동안 지성으로 고심한 것이 오로지 의리를 부식(扶植)하는 데 있었으니, 오늘날을 위하는 도리는 진실로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고 선왕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인심이 점차 옛날만 못하여 대신(臺臣)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글에 성명을 노출시키지 않고 가리어 숨기고 말하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인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자성께서 이미 이 일이 과중함을 아신다면 즉시 회오(回悟)하심이 마땅하며, 만약 처분하실 것이 있으면 전하께서 품지(稟旨)하여 처분함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철렴할 때 어찌 큰 형정(刑政)은 참여해 듣겠다.고 하교하지 않았던가? 나의 이 일을 그릇되었다 여기니, 나의 실덕(失德)을 내가 스스로 아노라. 이것은 내가 스스로 감당하겠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어찌 다만 큰 형정뿐이겠습니까? 비록 미세한 일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안에서 우러러 자성께 고하시고, 자성께서 전하를 협찬(協贊)하신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수렴하여 신 등을 대하시어 이런 하교까지 내리시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어떠한 거조이겠습니까? 실덕을 스스로 감당하시겠다는 하교는, 신 등이 우리 자성을 섬긴 지 몇 년인데, 어찌 이와 같은 하교를 받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즉시 속히 도로 정침(停寢)하심이 자성의 공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도달(導達)하시어 멀지 아니하여 복구하시는 도리(不遠復)로 삼으소서.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 무슨 공덕이 있으랴? 공덕 두 글자는 거짓말로 나를 속이는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비록 지극히 무상(無狀)하나 대신의 직임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면전에서 거짓말이란 엄한 하교를 받자오니, 두렵고 떨려 진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마땅히 나가 부월(鈇鉞)의 주벌(誅罰)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앞으로 나아오면 마땅히 다시 하교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나아가 엎드렸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지식이 없어서 3년, 4년 안에 한 가지도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단지 망극한 가운데 선왕의 성헌(成憲)을 준행하여 끌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일컬을 만한 공덕이 없었으므로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이제 엎드려 거짓말이란 하교를 받았습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이런 죄범(罪犯)이 있고서, 어찌 일각인들 천지 사이에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나의 실덕은 견식(見識)이 없는 소치가 아님이 없다. 본정(本情)을 죄다 말하느라 언사(言辭)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일로 나를 꺾어 누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수렴한 일을 사책(史策)에 쓴다면 진실로 마땅히 나의 죄과(罪過)가 될 것이다.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또 이런 하교를 받으니, 남의 신하가 되어 즉시 죽어 없어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고, 김관주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너무나도 황송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교하시는 사이에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조용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조용하게 도리를 말씀하셔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길래 곧 이처럼 너무나도 과중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견식이 없어 실언한 것이다. 그러니 경은 이것을 가지고 인죄(引罪)할 것이 없다. 지금 세도(世道)를 돌아보건대 단지 두 대신만이 있을 뿐이니,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인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이런 죄명(罪名)을 졌으니, 어찌 감히 다시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만, 구구하게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정성을 끝내 누르기 어렵습니다. 이번의 예사롭지 않은 일을 어찌 오랫동안 다시 정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비록 심히 무상하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자성의 덕에 비평한 것이 있다면, 눈을 밝게 뜨고 성토함을 어찌 혹 한 시각인들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의 일은 진실로 너무나도 예사롭지 아니한 것이니, 도로 정침하는 것이 한시가 급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마음을 돌리도록 힘써 하소서. >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경 등은 이미 나의 말을 옳지 않다 하고, 또 사단을 만들어 내고자 반드시 인구(引咎)하려고 하니, 진실로 몹시 개탄스럽다. 차후로는 만약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마땅히 언교(諺敎)를 써서 내릴 것이며 나는 들어가겠다. >하고, 드디어 문을 닫으니, 이시수는 말하기를, >오래지 아니하여 복구하시는 자성의 덕이야말로 신은 이루 다 흠앙(欽仰)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무사(無似)하오나, 대신의 이름을 띠고 있는데 삼가 두 구절의 엄한 하교를 받았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스스로 세상에 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엄한 주벌(誅罰)을 내리시어 신하의 분수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자성께서 하교를 내리시매 황공하여 몸이 떨릴 뿐입니다. 신은 좌상과 더불어 실로 다름이 없으니, 신 또한 마땅히 물러나 엄한 주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 대간 이기경(李基慶) 등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연명 상소는 대단한 실수였다. 차후로는 아무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명백하게 말하여 이런 상소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니, 이기경 등이 말하기를, >신의 연명 상소 가운데서 윗 조항의 구어(句語)는 길거리의 전문(傳聞)이 아니고, 곧 유생이 현관(賢關)에 써 보낸 글입니다. 그리고 아랫 조항에 운운한 바는 조항진(趙恒鎭)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장석윤(張錫胤)의 상소에 은연중에 언뜻 비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른바 궐전(闕典) 운운한 것으로 보아 조항진이 어찌 전혀 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 >- '''《[[순조실록]]》 6권, 순조 4년([[1804년]], 청 가경(嘉慶) 9년) 6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 실록의 관련 기사를 정독해 보면, 정순왕후는 재수렴 문제를 가볍게 퉁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하지만 이시수는 '재수렴은 부당하다'는 주제에서 물러서지 않고 원칙론과 명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소론계 이시수의, 나아가 시파의 기선 제압으로 이어진다.[* 역사 블로그인 '초록불의 잡학다식'에서는 이를 '주제 관철 신공'으로 부르며, 논쟁에서 승리하는 법의 예시로 들었다. --[[http://orumi.egloos.com/4788882|참조]]-- [[https://archive.li/937mm|아카이브]]] 다음날 정순왕후는 자신이 [[김조순]]의 [[순원왕후|딸]]을 [[순조]]의 [[왕비|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다는 것이 모함이라는 걸 해명하는 편지를 내렸고 심부전으로 불과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1745년]](영조 21년)생이니 [[1805년]](순조 5년) 당시에는 60세이다. 역대 대비들 중에서 조금 짧을 뿐 단명하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